여성 최초 스쿠버 강사가 헤쳐온 길
Dottie May Frazier(1922.7.16~2022.2.8)
미국 캘리포니아 롱비치 토박이 도티 프레이저(Dottie May Frazier, 1922.7.16~2022.2.8)는 2019년 만 97세에 자신의 애마 ‘가와사키’ 모터바이크를 팔았다. 차량면허관리국(DMV)이 그에게 면허증을 갱신해주지 않아서였다. 10대 말부터 바이크를 몰고 시에라네바다 사막서부터 멕시코 국경 너머까지 누비고 다닌 그였다. 하지만 그에겐 2023년까지 유효한 자동차 운전면허증은 있었다. 운전면허 연령 상한이 없는 미국이지만, 만 70세가 넘으면 면허시험이나 시력 테스트 등을 다시 치러야 하는 주가 많고 캘리포니아는 매년 1년씩 면허를 연장해준다.
나이 때문에 겪는 짜증스러운 일들이 못마땅했던 그는 90대 이후 “나를 평범한 노파로 여긴다면 그게 당신의 첫 번째 실수가 될 것”이란 문구를 새긴 T셔츠를 보란듯 입고 다니곤 했다. 물론 그를 아는 자라면, 롱비치 해양 레포츠의 산 역사인 그에게 그런 ‘실수’를 저지를 리 없었다.
걸음마와 함께 수영을 익혀 대여섯 살 무렵부터 스킨다이빙을 시작했고, 고교 시절엔 눈뜨자마자 강아지를 안고 한바탕 서핑을 한 뒤에야 등교하는 게 그의 일과였다. 그는 롱비치 바이크서클 여성 유일 정회원이었고, 롱비치 최초 다이버 클럽 ‘롱비치 넵튠스(Long Beach Neptunes)’의 1940년 창립 멤버였다. 그가 고집을 부려 롱비치 작살낚시대회(spearfishing contest) 여성부문이 만들어졌고 그는 꽤 오래 혼자 출전해 우승했다.
무엇보다 그는 미국(세계) 최초 여성 스쿠버다이버 강사 자격증을 획득했고, 여성으론 처음 다이버 클럽을 열어 운영했고, 여성용 다이빙 슈트를 직접 디자인하고 제작해 보급하며 미 해군과도 협업한 개척자였다. 한마디로 그는 다이버들의 전설이었다.
다이빙 전문지 ‘Scubanews’의 평가처럼, 그의 진짜 놀라운 점은 ‘무엇을 해냈느냐가 아니라 언제 해냈느냐’를 살펴야 비로소 드러난다. 그는 여자 수영복도 없던 1920년대에 수영을 시작했고, 여성 직업이란 게 뻔하던 30년대 18세 때 부터 프리다이빙 강사로 돈을 벌었다. 스쿠버다이빙이 갓 등장하던 무렵 당국과 싸우다시피 해서 강사 자격증을 땄고, 여자라서 못 미더워 하는 남성 수강생들을 가르쳤다.
파도와 조류, 수압 못지않게 거칠고 억센 젠더 차별의 장애물들에 부딪치고 헤치며, 여성 다이버의 세계를 연 파이터, 도티 프레이저가 별세했다. 향년 만 99세.
프레이저는 롱비치 해안에서 텐트촌을 운영하던 부모의 두 딸 중 장녀로 태어나 “태평양을 놀이터로 여기며” 성장했다. 2살 때 수영을 시작해 3살 무렵엔 알라미토스만(Alamitos Bay) 바다 반 블록 거리를 혼자 헤엄쳐 해안까지 올 정도가 됐다. 아버지(Francis Reider)는 그를 그렇게 키웠다.
딸 이름(Dorothy Adele)에서 딴 ‘도타델(Dotadell)’이란 6m짜리 보트에 딸을 태우고 바다를 쏘다니는 게 아버지의 낙이었고, 5살 무렵부터 아예 노를 맡기기도 했다. 프레이저는 2019년 자서전 ‘Trailblazer’에 “하루 한 번 꼴로 보트 바깥 물속에 뛰어든 뒤 기겁하는 아버지에게 ‘일부러 빠진 거’라고 말하곤 했다”고 썼다. 프리다이빙도 그렇게 익혔다. 6세 때 어느날 캐틀리나섬 인근서 텀블러를 물에 빠뜨린 아버지가 그에게 대신 건져 달라고 청했다. 프레이저는 그날 수심 4.5m 프리다이빙에 성공했고, 이듬해엔 롱비치 항구 인근 바다에 빠진 2살 아래 동생(Jeanne)을 구해내기도 했다.
아버지가 10살 된 그에게 소방 호스와 수경을 테이프로 감아 만든 일종의 스노클링 마스크를 선물했다. 프레이저는 “마치 기적 같았다.(…) 그때부터 비로소 바다가 내 세계가 됐다. 바닷속 새로운 것들이 매일매일 눈앞에 펼쳐지며, 물속이 환상의 세계가 됐다”고 책에 썼다. 이후 아버지는 그에게 저녁 반찬거리- 전복, 바닷가재 등-를 잡아오라고 시키곤 했고, 이웃들도 더러 그에게 주문하곤 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작살낚시도 시작했다.
세 살 무렵 부모가 이혼하면서 그는 아버지, 조부모, 고모 집을 오가며 컸고, 그 경험이 자립의지를 키운 계기가 됐다. 프레이저는 “아버지는 아들이 없어 나를 아들처럼 키웠다“고, 아버지에게서 배운 복싱 기술로 “학교 개구쟁이 몇 녀석의 코피를 터뜨리고 눈을 멍들게 한 적도 있다“고 책에 썼다.
그는 만 18세 때인 1940년부터 관광객과 동호인들에게 프리다이빙을 가르쳤고, 1955년 LA 스쿠버다이빙 강사 자격증을 땄다. 장비가 워낙 무겁고 비싸서 여성 다이버는 아무도 상상도 하지 않던 때였다. 당국은 그의 응시 원서를 반려하며 ‘남자만 된다’는 내용의 답장을 보내왔다. 프레이저는 친구 짐 크리스찬슨(Jim Christiansen,1926~1999)에게 도움을 청했다. 다이버클럽 ‘넵튠’ 설립자로 지역 작살낚시의 1인자였던 짐은 프레이저의 기량과 배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였다. 프레이저는 그렇게 어렵사리 시험에 응시했고, 수석으로 자격증을 획득했다.
첫 수강 신청자는 남성 의사 8명이었다. 그들은 장비 없이 진행되는 첫날 수업을 그들 중 한 명의 집 수영장에서 해달라고 청했다. 당일 프레이저를 본 그들은 뜨악한 표정으로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라며 수강을 거부했고, 프레이저가 ‘우선 30분만 해보고 성에 안 차면 돌아가겠다’고 해서야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 프레이저는 평생 약 2,000여 명에게 스쿠버 다이빙을 가르쳤다.
철제 다이빙 헬멧을 쓰고 해녀들보다 더 깊은 물에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남성 직업 잠수부를 한국서는 ‘머구리‘라 부르고 미국서는 ‘하드햇다이버(hard-hat diver)’ 혹은 ‘심해 다이버(deep-sea diver)’라 부른다. 프레이저는 1959년 역시 여성으로선 처음 하드햇다이버가 됐다. 그는 “벌이는 꽤나 좋았지만 장비가 너무 억압적이어서” 2년 만에 그만두고, 번 돈으로 롱비치 해안에 자신의 ‘펭귄 다이버샵’을 열었다. 30대 여성이 사업을, 그것도 거의 남자들만 상대해야 하는 다이빙샵 사장이 된 거였다. 그 매장을 그는 약 15년간 운영했다.
50년대 초 등장한 스쿠버다이빙은 남성 레포츠였다. 장비며 옷이며 모두 남성 체형에 맞춰 제작됐다. 여성에겐 너무 무겁고 컸다. 비싸기도 해서 고무 소재 슈트도 일부 부유층 전유물이었고, 50년대 말 등장한 네오프렌(neoprene) 소재의 웻슈트도 마찬가지였다. 여성들의 몸에 맞지도 않았다. 프레이저보다 2년 뒤인 57년 스쿠버 강사 자격증을 딴 미국 ‘여성 다이버 명예의전당’ 회원 바버라 앨런(Barbara Allen)도 당시 상하의로 나뉜 남성 다이빙복을 입다가 나중에야 맞춤복을 입었다. 80년대 여성용 웻슈트가 출시됐지만, 역시 명예의전당 멤버인 로레인 새들러(Lorraine Sadler)에 따르면 “바비 인형 몸매의 여성이나 입을 수 있는 옷”이었다. 신축성이 가미된 네오프렌 원단 슈트가 출시된 것은 1980년대 말부터였다. 70년대말 등장한 방수 드라이슈트 역시 여성용 기성복은 1995년에야 출시됐다. 새들러는 옷이 너무 커서 몸에 덕테이프를 친친 감곤 했다고 말했다. 부력을 조절해 원하는 수심에 머물 수 있게 돕는 다이빙 장비인 부력조절기(BCDs)도 여성용은 1988년에야 처음 출시됐다. 초창기 여성 다이버들은 장비의 허들까지 넘어야 했다.
키 157.5cm에 몸무게 50kg 남짓이던 프레이저에게도 다이빙 슈트는 그림의 떡이었다. 게다가 그의 “가슴은 무려 42인치”였다. 경제적 여유도 없었지만, 생애 첫 스노클링 장비서부터 ‘사제품’에 익숙했던 그는 울스웨터와 긴 속옷, 울양말을 재단하고 기워 다이빙슈트를 만들어 입었고, 60년대 초부터 네오프렌 슈트도 직접 제작해 ‘펭귄 웻(드라이)슈트’라는 이름으로 매장에서 판매했고, ‘US Divers’란 브랜드로 미 해군에도 납품했다.
그는 배나 자동차 변속기도 직접 교체할 만큼 기계 수리에도 능했다. 그가 바버라 앨런을 태우고 캐틀리나 섬으로 다이빙 투어를 갔다가 보트 엔진이 멎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앨런은 “배를 견인하려고 다가온 해안경비대 순시선에 프레이저가 손사래 치더니 ‘이걸 못 고치면 내가 아니지’라고 하곤 공구상자를 들고 와 기어코 고치더라”고 회고했다.
프레이저는 스키와 수상스키에도 능했고, 라켓볼과 당구는 선수급이었다. 하지만 그의 직업은 다이빙 강사였고 ‘상업 어부(commercial fisher)’였다. 그에게 다이빙은 원년 대다수 여성 다이버들과 달리 놀이에 앞서 생업이었다. 스키 사고로 다리가 부러져 수술을 받은 뒤에도 다이빙복에 지퍼를 달아 입었고, 작살 낚시로 잡은 물고기를 노리고 달려든 대형 바다표범에게 부딪쳐 갈비뼈 넉 대가 부러진 적도 있었다. 캐틀리나 섬에선 달려드는 맷돼지를 작살총으로 제압한 적도 있었고, 바하멕시코(Baja Mexico)에선 거대한 백상아리와 맞닥뜨린 적도 있었다. 그는 호기심을 보이던 백상아리를 향해 정면으로 유영해 다가가자 상어가 먼저 꽁무니를 빼더라고 했다. 출산 직후에도 그는 친구에게 하얀 깃발을 들려 아이를 돌보게 한 뒤 젖 달라고 보채면 깃발을 흔들어 달라고 부탁하곤 바다에 나갔다. 그렇게 번 돈으로 그는 1940년 만 18세에 독립하며 작은 방갈로 같은 집을 장만했고, 평생을 거기서 살았다. 그는 40년과 51년 두차례 결혼-이혼하며 아들 넷을 낳았고, 호주에서 서핑하러 온 연하의 음악가(Cyril May)와 73년 결혼해 해로했다.
말년의 프레이저는 롱비치 자신의 집 뜰을 텃밭으로 가꾸는 일에 몰두했다. 뜰에는 꽃이 아니라 콩, 토마토, 베리, 비트, 아티초크, 브로콜리 등 식용 채소와 유실수로 가득했다. 바다에서처럼 그는 마당에서도 실용적 가치를 함께 추구했다. 지역 소방대장을 지내고 은퇴한 아들 대니(Danny Frazier)는 “어머니는 자급자족을 원했다.(…) 심지어 밭에 뿌릴 물도 커다란 통에 빗물을 받아 썼다”고 말했다.
그는 아버지에 이어 롱비치 운영위원으로 말년까지 일했고, 만 93세였던 2016년 샌버나디노산(San Bernardino Mt.) YMCA 캠프오크스(Camp Oakes)의 짚라인(Ziplining) 최고령 도전 기록을 세웠다. 2008년 넘어져 경미한 뇌진탕을 입고도 “나를 물러서게 할 수 있는 건 없다”고 호언했다는 그다. 2020년 3월 그를 인터뷰한 한 기자에게 만 99세에 별세한 아버지의 수명 기록도 넘어서겠다며 “만 100세 생일 파티에 초대할 테니 시간 비워 두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2019년 미국 다이빙협회 개척자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여성다이버 명예의전당에 합류했다.
그와 같은 해 명예의전당에 든 다이버 겸 작가 진 슬리퍼(Jeanne B. Sleeper)는 “프레이저가 앞서 파도를 부수며 길을 터준 덕에 우리는 그가 지나간 자리(fin wake)를 따라 나아갈 수 있었다. 그는 시대를 앞서 산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 출처 : https://m.hankookilbo.com/News/Read/A2022041414250002344